[Interview in Depth] '노벨상 경제 석학' 게리 베커 시카고大 교수
"5000만명 한국, 홀로서기는 힘들다"
서울 워커힐호텔 중식당에서 만난 그는 진회색 정장에 붉은 색 도트(dot) 무늬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올해로 78세. 1957년부터 무려 50년 이상 교수 생활. 전공은 경제학. 얼굴엔 세월의 무게가 역력했지만, 고리타분한 학자풍이라기보다는 멋쟁이 노신사 분위기가 풍겼다.
게리 베커(Gary Becker·78) 미국 시카고대 교수. 199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세계적 석학이다. 교육과 훈련, 건강관리에 대한 투자를 통해 노동력의 질(質)을 높일 수 있다는 '인적자본(人的資本·human capital)' 개념이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 토대가 됐다.
그는 중식당에서 요리 코스가 끝난 뒤 자장면을 주문해 젓가락 대신 포크로 먹었다. 그는 "처음 먹어보는데 맛이 괜찮은 것 같다"며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음식을 접하는 것은 삶에 새로운 활력을 준다"고 했다. 그는 80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여전히 테니스와 수영을 즐긴다고 했다.
이런 개방적인 라이프스타일은 독창성을 강조하는 그의 학문 활동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그는 다른 경제학자들이 수학과 통계학에 매몰돼 있는 사이에 범죄나 인종 차별, 결혼과 같은 사회학적 문제들을 경제 이론으로 설명함으로써 경제학의 영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 중인 시카고대는 그의 사상이 꽃피는 자양분이 됐다.
이 대학은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주창하는 신(新)자유주의의 산실이다. 역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61명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24명을 배출한 경제학의 명문이다. 흔히 '시카고 학파'로 불리는 이들 시카고대 출신 경제학자들은 정부 개입 축소와 시장주의, 그리고 개인과 기업의 자유가 경제 활동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시카고 학파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첫 번째 비결로 독립적(independent)인 연구 풍토를 꼽았다. 동부나 서부의 주요 대학들과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기에 오히려 정부 정책이나 유행에 연연해하지 않고 독창적인 연구 풍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우리는 워싱턴에 불려 가는 것보다 동료들과 연구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카고에서는 학문적 논쟁을 즐긴다"며 "학생들이 '프리드먼 교수에 따르면…'이라고 얘기하면 '그 사람의 생각을 외워 말할 게 아니라 너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라'고 고쳐준다"고 했다.
그는 나지막하지만 명쾌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으로 오랜 경험으로 한층 다져진 자신의 학문 세계를 2시간에 걸쳐 풀어 놓았다. 인터뷰는 박우규 SK경영경제연구소장과 함께 진행했다.
―세계화에 대한 불만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경제는 늘 불안합니다. 어떻게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까요. 결론은 글로벌 마켓으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유연한 경제체제 하에서는 누군가 직장을 잃는다면 또 다른 사람이 일자리를 잡습니다. 한국은 SK나 삼성 같은 기업이 세계 무대에서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화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글로벌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다며 스피드에 불만인 사람이 많은데요.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규제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자유무역입니다. 글로벌화는 거대한 찬스를 준다는 걸 여러 나라들이 잘 모르고 있어요. 세계에는 더 큰 시장이 있습니다. 중국은 큰 시장이고, 미국도 3억 인구의 시장이죠. 한국 인구가 5000만명인데, 그 정도의 규모로는 홀로 살아가기 힘듭니다. 글로벌 체제로 성공적으로 이전해야 합니다."
―세계의 제조업이 중국이나 베트남, 인도 같은 저비용 국가로 급속히 이전하는 중입니다. 이 때문에 한국도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선진국은 더 이상 저임금 생산구조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포커스를 고품질 상품을 생산하는 제조업과 서비스, 그리고 금융으로 빨리 전환해야 합니다. 홍콩을 보세요. 과거에 싸구려 물건만 만들어내다 지금은 금융과 서비스의 중심지로 훌륭히 재탄생했습니다."
게리 베커(Gary Becker) 교수는 이달 초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의 10주기(周忌) 기념 특별 세미나 참석차 서울에 왔다. 그는 노벨상 수상 직후인 지난 1993년 최 회장 초청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데 이어 이번이 세 번째 방한이라고 했다.
―미국 대학에서 많은 한국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 학생들을 가르쳐본 느낌이 어떤지요.
"한국 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합니다. 하지만 토론 문화나 창의성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일본은 더 하지요. 제 경험으로 보면 아시아 학생들은 '암기 학습(rote learning)', 즉 선생님이 얘기한 것을 외우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고등교육의 핵심은 학생들이 스스로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주시죠.
"제가 어떤 경제 이슈에 대해 질문을 한다고 칩시다. 많은 아시아 학생들은 '밀턴 프리드먼에 따르면~'이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제가 즉시 지적합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프리드먼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 이슈와 관련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지라고요. 답을 얻는 데에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 진정한 고등교육입니다. 그게 시카고 학파의 철학입니다. 유럽이나 남미 학생들은 아시아 학생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 "인구 고령화 문제, 이민(移民) 정책으로 풀어야"
―선진국과 한국은 점차 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의 노동력이 부족해 사회의 활력이 떨어지고 미래에 대한 우려도 커지는 추세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예전에 얘기했듯이 인구 감소는 경제에 좋지 않습니다. 한국은 인구 측면에서 상당히 비관적입니다. 한국의 출산율은 일본이나 미국보다 낮습니다. 출산율을 급격히 높일 수 없다면 이민(移民)을 늘리는 방안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젊은이들이 노인 세대를 부양하기 위해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합니다. 사회 전체의 혁신 의지나 역동성도 떨어지게 됩니다. 미국도 적극적인 이민 정책을 통해 인구를 늘렸죠."
―이민 활성화 대신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통해 출산율을 높이는 방안은 어떤지요.
"둘째 아이를 낳으면 정부가 보조금을 준다든지 해서 출산율을 높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런 정책은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고, 효과 또한 제한적입니다. 프랑스, 캐나다 등의 예로 판단컨대 출산율 상승은 정부 보조만으로는 어렵다고 봅니다."
■ "미국 경제, 약한 경기후퇴일 뿐"
―미국의 금융 위기가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데, 어떻게 전망하는지요.
"심각한 위기이긴 하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여러 방향으로 더 큰 위기가 오지 않도록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봅니다. 미국 경제는 성장을 거듭해왔습니다. 현재 금융부문이 어렵긴 하지만 경제 전체의 위기는 아닙니다. 수출이 잘되고 서비스 부문도 강하죠. 최근에는 성장의 속도가 다소 느려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유럽의 어느 단일 국가들보다는 나은 수준입니다. 약한 경기후퇴(mild recession)라고 할까요."
―미국 정부가 주택담보대출(모기지)부실 문제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까요.
"저는 미국 경제에 대해 매우 낙관적(very optimistic)입니다.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강합니다. 모기지 위기는 여러 실수가 겹쳐서 발생했습니다. 미국 경제가 계속 성장하자 금융기관과 주택건설 회사는 집값이 계속 오를 줄로 낙관했습니다. 일반인들도 미래 가치를 기대하고 많은 돈을 집에 묻어뒀죠. 집값이 더 이상 오르지 않자 위기가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버블(거품)입니다. 이것을 재조정(re-finance)할 필요가 있어요. 고통이 따르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걸로 봅니다. 주택시장이 경제 전체를 좌우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 "미래는 교육에 달려 있다"
―2005년 교수님이 발표한 논문 '행복의 효율적 진화'에 따르면 사람의 행복은 개인사(個人史)와 더불어 사회적 환경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한국은 최근 법 질서가 위협받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약해진다는 비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세계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의 수준이 나쁘지 않습니다. 한국 실업률이 3.5% 수준이라고 하던데 미국은 5%, 프랑스·독일은 8%대입니다.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려면 교육시스템이 중요합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고등교육이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교육이 국가 발전에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파워포인트 자료를 보여주면서) 1970년과 2000년 사이에 대략 100여 개 국가의 1인당 소득과 고등교육을 받은 30~34세 사이의 남녀의 비중을 봅시다. 소득이 높은 나라들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의 비중이 높습니다. 특히 여성의 고등교육 비율은 획기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교육을 통해 얻는 효과를 단적으로 얘기한다면 어떤 게 있는지요.
"제가 9개월쯤 전에 비서를 뽑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컴퓨터 활용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래서 지원자들에게 구글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중 3분의 2 정도는 구글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대한 접근 방법이나 활용 방법에 대해 상당히 무지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인적 자본이 경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가요.
"인적 자본이 경제가 성공적이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이와 더불어 유연한 노동시장과 제품시장, 창업과 기업을 영위하는 데 우호적인 환경, 그리고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교육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효율적인 경제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높은 교육수준에도 불구하고 경제 자체는 매우 비관적인 쿠바가 좋은 사례이죠."
―국민들의 마인드도 글로벌하게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 대해서도 교육이 필요하겠죠.
"학생들이 세계화가 주는 장점과 가치를 이해해야 합니다. 세계화는 부자나 선진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과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인도에 신분제도가 엄격했지만, 글로벌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인도의 정치·사회제도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교육 분야도 더 많은 경쟁이 필요합니다. 학생뿐 아니라 교사도 경쟁해야 합니다. 한국이나 미국은 교사 노조가 강해서 경쟁력에서 뒤지는 측면이 있어요."
■ "인적 자본은 경영의 기본"
―노벨상을 받은 뒤에는 뭐가 달라졌나요.
"돈이 좀 더 많이 생겼죠.(웃음) 여행도 많이 다니고. 여러 곳에서 초청 강연 요청이 오고, 저를 만난 모든 사람이 다양한 이슈에 대해 제 의견을 물어보더군요. 그 밖의 생활은 예전과 그대로입니다."
―지금까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힘들진 않나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시카고대에 제 이름을 따서 '베커 센터'라고 부르는 연구소가 있습니다. 경제 분석과 규제 문제를 연구하죠. '괴짜 경제학(Freakonomics)'의 저자인 스티븐 레빗 교수가 소장인데, 자주 만나 의견을 나눕니다. 개인 블로그도 매주 관리합니다. 미국 경제에 관한 글을 주로 올립니다."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과 인연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시카고대에서 비슷한 시기에 공부를 했고, 1969년에 제가 모교 교수로 부임한 이래 서로를 잘 알고 지내게 됐습니다. 최 전회장과는 비즈니스, 교육의 역할, 그리고 글로벌 경제에 대해 토론을 수없이 했습니다. 최태원 현 SK 회장도 시카고에서 수학해 가족 전체가 서로 잘 알고 지냅니다."
―최 전회장의 인재(人才) 중심 경영철학은 교수님의 인적 자본(human capital) 이론에 큰 영향을 받았겠군요.
"서로가 영향을 줬지요. 최 전회장은 교육, 다시 말해 '인적 자본'의 중요성에 대해 엄청나게 강조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회사란 좋은 인적 자본을 잘 찾아서 그 인적 자본, 즉 사람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회사라고 생각했죠. 그렇지 않으면 좋은 회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내가 만났던 미국의 많은 기업인들도 공유하는 중요한 통찰력(insight)입니다. 인적 자본은 경영의 기본이자, 강한 회사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인입니다."
"한국의 경제 환경이 만족할 만큼 좋지는 않습니다(not good enough)."
한국 경제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자 베커 교수는 파일첩에서 자료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한·미·일 3개국을 비교한 그래프가 들어 있는 파워포인트 자료였다.
"경제 자유에 관한 수치를 보면 미국이 제일 높고, 일본에 이어 그다음이 한국입니다. 한국은 중소기업 같은 신규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환경도 안 좋습니다. 정부 규제를 줄이고 세금을 낮추는 등 경제 자유도를 높여야 합니다. 노조가 너무 강한 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그는 최근 한국 정부가 발표한 대대적 감세(減稅)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국의 감세 정책이 부자를 위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고 전하자 그는 "단기 효과와 장기 효과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감세가 단기적 관점으로는 부자에게 유리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투자를 장려함으로써 일자리가 늘어나 빈자(貧者)에게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그는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투자에 대한 세금을 줄인 국가가 높은 성장을 구현하고 선진국으로 간다"며 "줄어드는 세수(稅收)는 정부 효율화를 통해 정부 지출을 줄이면 된다"고 주장했다.
베커 교수는 최근 성장 속도가 느려진 한국 경제에 대해 "저비용 생산구조를 버리고 글로벌 시장에서 첨단 기술과 고품질을 앞세운 제품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지만 세계 시장을 생각하면 시야가 훨씬 확장된다는 것이다.
박우규 SK경영경제연구소 소장





